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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마 톤즈>와 시장경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수십만 부씩 팔려나가면서 한국 독서계에 돌풍을 일으켰고 한편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고 이태석 신부의 『울지마 톤즈』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또 정치권에서는 ‘공정’, ‘정의’, ‘동반성장’, ‘이익공유’를 담은 정책들을 양산하고 있다. 공동체, 연대, 약자에 대한 동정ㆍ배려ㆍ희생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신호가 강하게 작동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 이기심, 개인주의, 경쟁이라는 개념을 넘어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 한층 강해지는 것이다. 『울지마 톤즈』를 보면서 가슴 벅찬 감동으로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개인주의를 넘어 공동체정신으로, 이기심을 넘어 이웃과 고통을 함께”라는 주장과 슬로건에 공감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사회에 새롭게 조성된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우리 사회를 정화하여 좀 더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로 진화되기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강자에 대한 적대심’, ‘약자에 대한 한없는 동정심’은 사회의 ‘위험신호’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현대사회구조에서 긴장과 갈등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이론적으로 부정하거나 그것을 넘어선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한없는 공감을 표시하는 이런 현상을 일종의 ‘문명사회의 긴장이나 불안’에서 나온 ‘불안한 사회현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긴장과 불안은 ‘강자에 대한 시기와 적대심’, ‘약자에 대한 한없는 동정심’을 유발하여 약자와 가난이 도덕적 선이며, 강자와 부는 악이라는 인식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권력의 강약(强弱)과 부의 많고 적음이 윤리적 선악과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한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것은 부자가 부자이기 때문이고, 중소기업이 어려운 것은 대기업 때문이고, 내가 건강하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이 건강하기 때문이라는 극단적인 사고로 빠져들게 한다. 이것은 사회의 희망이 아니라 ‘위험신호’이다.


공동체를 상실한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공동체주의라는 대안적 윤리를 내세우는 마이클 샌델,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장하준, 온몸을 던져 아프리카 수단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고 이태석 신부의 정신 속에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고발이 숨어 있다. 이는 현대인의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적대감과 대안 모색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샌델과 장하준 교수는 학자이고, 이태석 신부는 영적인 성직자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함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모두 인간의 윤리를 강조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고 이태석 신부의 삶이 숭고해 보인 이유는 종교지도자로서 그의 종교적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 버려진 사람들과 함께 한 그의 숭고한 정신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문명을 추동하는 동력은 이기심, 개인주의, 경쟁에 기초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버리라고 외치거나 인류의 연대성에 기초하여 이기심을 극복하고 이웃을 위해 헌신한 삶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샌델ㆍ장하준과 고 이태석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연대와 이타주의에 기반한 경제를 꿈꾸며 사회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신념을 몸소 실천한 이태석 신부의 삶은 질적으로 구별된다. 경제가 연대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장과 몸소 연대성을 실현하는 삶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이타적인 삶의 양식을 경제의 운용에 그대로 원용할 수는 없다.


경제는 자체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는 사실을 망각해선 안 돼


장하준 교수의 지적처럼 “개인, 그리고 개별 기업의 생산성을 결정하는 데에 시스템”은 중요하다. 미국의 유명한 투자자 워런 버핏이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의 많은 부분이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벌어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말도 시스템의 중요성을 웅변한다. “사회가 벌어주었다”는 말의 뜻은 법과 제도가 버핏의 부의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버핏이 나올 수 없다.


그러나 버핏처럼 사업가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아 자신이 번 돈을 사회에 기부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개인 자선의 문제이다. 이런 개인적 미덕은 아름답고 살기 좋은 사회를 위해 필요한 사회적 연대를 강화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미덕을 정부에서 강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1970~1980년대에 정부가 시장논리를 뛰어넘는 지원을 하지 않았다면 삼성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없었다”1)라며 ‘초과이익 공유제’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주장을 한다. “한국의 대기업은 국민적 성원과 정부의 보호 속에서 특혜를 받으며 성장했다. 국민, 서민경제가 나빠져만 가는 현실 앞에서 대기업과 부자, 특권층은 서민 중산층과 서로 힘을 합쳐 사는 것에 적극 관심을 가져야 한다”2)고 호소하기까지 한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성공한 기업을 향해 가난한 이웃이나 어려움에 처한 중소기업을 위해 기업 차원에서 기업을 운영하고 이익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제와 윤리를 섞어놓은 것이다. 국가의 지원으로 기업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 기업이 자신의 이익을 독식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기업에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개인의 악행을 적용하는 것으로 기업의 속성을 무시하고 윤리적으로만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냉철한 머리’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만으로 경제현상을 통제하려는 이런 일은 경제가 개인이나 집단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할 수 없는 자체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였기 때문에 나온다.


일부의 주장대로 현재 성공한 기업들이 정부 지원이나 시스템에 의해 성장했기 때문에 수익의 일정부분을 국가에 환원해야 한다면 법과 제도와 같은 시스템을 가지고 해야지 윤리에 호소해 강요할 일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대기업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중소기업인의 울분에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를 대기업의 윤리적 행위로 해결할 수는 없다. 기업가는 도덕성을 가질 수 있어도 경제는 그 도덕성과 무관하게 그 자체의 작동원리를 가지고 있다.


경제의 작동에 인간의 윤리가 개입하면 경제는 더 이상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 작동하지 못하고 움직임을 멈춘다. 경제에 윤리를 섞으면 경제뿐만 아니라 윤리가 원래 추구하려고 한 목적도 파괴된다. 어떤 것이 명백한 악이라면 국가의 윤리가 아니라 법과 제도를 통해 악을 제거하고 그것이 재발하지 않도록 제어해야 한다. 자발성에 기초한 윤리에 호소하여 경제가 분비한 불의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성직자의 태도이지 정치가나 행정가의 태도는 아니다. 자연현상과 윤리, 법과 제도를 구별하지 못하고 도덕적인 관점에서 사회문제에 접근하는 이상주의자의 꿈은 이 세상을 개선하기는 고사하고 더 큰 고통으로 몰고 갈 뿐이다.


신중섭 (강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joongsop@kangw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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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의 말이다.

2)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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