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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I 컬럼

전문가들이 펼치는 정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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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호의 의지를 다질 때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지난 시점에 천안함 피침사건의 여파가 우리나라의 안보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노무현 정권이 밀어붙였던 전시작전권 환수가 2015년으로 연기되고, 국회가 뒤늦게나마 “북한의 천안함에 대한 군사도발 규탄 및 대응조치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민의 안보에 대한 경각심도 더 커진 것으로 보인다. 행정안전부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청소년과 성인 모두 73~75%의 비율로 “북한이 천안함 사건의 배후이며, 다시 도발할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한다.1) 그러나 북한을 경계 및 적대 대상으로 본다는 응답비율이 61%로 작년에 비해 22%포인트 높아졌지만, 청소년들은 41.5%만 같은 답변을 보여 큰 차이를 보였다. 주로 청소년과 장년층에서 북한을 안보위협으로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적대세력으로 보기도 꺼려하는 경향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일보와 한국정당학회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90%가 “한국전쟁이 남침”이라고 답했지만, 47%만 “전쟁 책임이 김일성 정권에 있다”고 하였다. 또 “전쟁 책임이 남북한 모두에게 있다”고 보는 응답비율이 60대는 2.5%, 40대는 21%, 20대는 28%라고 한다.


다른 여론조사의 결과도 우리의 대북 인식은 대체로 혼란스럽고 안보의식은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2) 한국전쟁은 3년간 300여만 명의 희생자를 낸 참혹한 전쟁이었고, 정전상태로 남아 있는 실체적 안보위협이다. 천안함 피침은 전후 57년간 북한정권이 끊임없이 저질러 온 무력도발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에서 지키려 했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드러난 안보위협에서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에 대해 별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수년 전 6월 25일 자동차로 미국 미시간주 서부를 여행하던 중 어느 시골마을 휴게소에 들른 적이 있다. 그곳은 미시간호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자그마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고, 묘지는 아니지만 한 귀퉁이에 5피트 남짓한 크기의 검은 비석이 서 있었다. 공원에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몇몇 가족이 있을 뿐인 한적한 분위기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이제 막 헌화한 듯 작은 화환들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기념비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그 마을 출신의 전사자 5명의 이름과 어설프게 그려진 한국지도, 그리고 “한국에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다 산화한 우리 마을의 젊은이를 기리며”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기념비 주변은 별다른 조형물도 없고 개인 정원처럼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그때의 감동이 잊히지 않는 것은 낯선 이국땅에서 전사한 할아버지 세대의 희생과 그 정신을 아직도 소중히 여기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나라의 부름을 받아 참전했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우리 식 삶의 방식(our way of life)”을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인식했을 터이다. 그렇기에 참전에 대한 자부심과 그 희생에 대한 추모를,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으면서도 대를 이어 기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들은 자유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고, 그런 믿음으로 과거를 기억하려는 듯 보였다. 새삼스럽게 이 기억을 되살린 것은 현재 우리의 안보의식과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전쟁이 지켜준 자유의 가치를 소중히 평가해야 할 보다 직접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반세기 전 외국인들이 가망이 없다고 진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세계가 부러워하는 수준의 민주적 정치체제와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기아ㆍ영양결핍ㆍ문맹이 만연했던 세계 최빈국이 이를 퇴치하고 세계 15위의 중견 경제국으로 도약하였고, GDP 대비 연구개발비를 영국ㆍ미국ㆍ독일보다 더 많이 쓰는 미래형 국가로 성장하였다.3) 정치ㆍ경제ㆍ사회의 주요지표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레가툼 번영지수(Legatum Prosperity Index)’로 보면 한국은 세계 상위 4분위 수준에 올라와 있다.


우리나라가 이룬 이런 문명사적인 성취는 개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처지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허용한 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 교수가 갈파한 대로 풍요로운 문명사회는 어떤 전체주의적 이념이나 정부 지시에 의해서 달성된 적도 없고 오직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4)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 동안 우리는 험난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켜 왔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로운 사회와 경제적 번영은 전적으로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민족통일의 목표에 집착한 전체주의 북한정권이 주민을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내몰고 있는지, 북한을 지원한 러시아와 중국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면 우리의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미래에 개개인의 행복과 번영이 함께 하려면 자유를 억압하는 어떤 정치세력이나 사회 분위기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북한정권은 바로 그런 정치세력이고 북한정권의 안보위협을 외면하는 경향은 그런 사회 분위기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미래는 자유가 없는 암울한 세상이다. 한국전쟁이 정전되고 나서도 반세기가 지나기까지 북한정권은 우리의 생명과 재산, 자유로운 삶의 영위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도발을 일삼더니 급기야 천안함을 폭침하고 46명 장병의 고귀한 생명을 빼앗아갔다. 지난 좌파정권이 주도했던 10여 년간의 햇볕정책의 결과가 폭력정권의 핵무장에 이어 이런 군사적 도발까지 이른 것이다.


북한주민을 억압해 온 김일성ㆍ김정일이 포악한 전제군주나 다름없고 북한정권의 실체가 민족주의의 탈을 쓴 독재정권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친북인사나 종북 세력이 동족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을 호도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전체주의 정권이며 주민을 노예화하는 사악한 집단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그들의 이념을 역사적으로 공유한 적도 없고 그들이 제시하는 미래에 살아야 할 어떤 명분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천안함 사태가 북한의 소행임이 아주 분명한데도 시민들은 그들을 규탄하기보다는 정부의 경위조사 발표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거나 우리 군 당국의 잘못을 질책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였다. 북한의 소행임이 명백한 구체적 증거가 나왔는데도 그 흔한 규탄대회 한 번 벌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시민들은 운 나쁘게 일어난 안보사고의 하나 정도로 여기고 싶어 한 것 같았다. 드러난 실체적 안보위험에 맞서기보다 내 자식이 전장에 나갈 것을 두려워하고, 주식가격이 떨어질까를 더 걱정하는 듯 보이기도 하였다. 이런 분위기가 외국인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여겨지고, 이를 집단적 외면(collective shrug)이라고 냉소적으로 표현하기에 이른 것이다.5)


이런 사정들은 자유가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경험적 가치이고 지켜야 할 가치이지만 동시에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가치임을 의미한다.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가 자유수호의 가치를 얼마나 피부로 느끼는가 하는 점이다. 북한정권은 자유라는 가치를 우리와 공유할 수 없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므로 우리를 위협하고 지배하는 방법 외에는 대안을 가질 수 없다. 북한정권과의 관계에서 타협은 자유의 희생을, 굴복은 자유의 포기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자유수호의 전열을 정비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의 혼란스러운 안보의식은 청장년층의 다수가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발전해 온 경로와 그 가치에 대해 믿음이 없는 데서 나온다. 그들은 한국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이고, 친북좌파 세력의 집요한 선동의 영향으로 우리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데 익숙해진 세대이다. 그렇기에 편향된 이념으로 쓰인 교과서와 왜곡된 역사인식을 방치하고, 그들의 거짓 선전과 위선을 폭로하고 자유의 소중함을 알리는 데 소홀했던 기성세대는 그 책임을 무겁게 느껴야 한다. 우리는 젊은 세대들을 그릇된 역사관에서 해방시켜 그들의 열정을 미래지향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할 책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오직 자유롭고 변화를 허용하는 다양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다수의 우리 국민은 언제부터인가 북한정권을 애써 동포의 일원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고 기회만 되면 우리를 침략하고 우리의 삶을 파괴할 위험으로 보기를 꺼려하게 되었다. 그런 오류는 북한정권의 실체에 대한 혼동이거나 평화에 대한 희망적 기대에서 나온다. 우리 사회에는 자유민주주의의 그늘에 숨어서 북한정권의 안보위협을 과소평가하거나 대북 유화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한다. 일부 정치권, 종교단체, 시민단체에서는 여전히 북한정권과 북한주민을 구분하지 않고 민족 화해를, 평화를 위해서 북한정권과의 타협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 진정으로 북한동포를 아낀다면, 북한주민만을 돕고 주민 탄압을 일삼는 북한정권을 규탄하는 데 힘써야 하지 않는가? 지난 정권과 친북세력이 지지해 온 대북 유화정책은 북한정권에게 핵무기를 주고 안보위협을 크게 증대시켰지만 북한주민의 처지를 더욱 곤궁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북한인민도 동족”이라는 논리로 사실을 은폐하거나 “그러면 전쟁을 하자는 말이냐”라는 위협, 또는 “어떤 평화도 전쟁보다 낫다”라는 궤변으로 여론을 현혹시키려 한다.


그러나 북한정권과 같이 야만적인 폭력세력과 타협하는 것은 정의롭지도 현명하지도 않다. 야만적 폭력세력에 의한 살육과 파괴가 종종 동족 간에 발생해 왔음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입증되어 왔다. 북한정권의 안보위협을 과소평가하고 이를 외면하려는 자세는 우리의 존엄과 자유를 포기하는 타락한 마음가짐에 지나지 않는다. 밀턴은 “타락한 국민은 자유보다는 굴종을, 힘든 자유보다는 편한 예속을 더 좋아한다”라고 지적하였다.6) 야만세력에 대한 유화정책은 현명하지 못한 정책일 뿐만 아니라 의도한 안전도 지켜주지 못한다. 로마제국의 쇠망과 몰락, 임진왜란,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경험은 폭력세력에 대한 무마정책이나 돈으로 평화를 사려는 시도는 결코 평화를 유지시켜주지 못하고 생명, 재산, 그리고 자유의 파괴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보여주었다.


로마제국은 오현제시대(五賢帝時代)를 지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제국의 수도 로마는 인구가 100만을 넘었고 전 세계에서 물자와 사람이 모여드는 번성한 도시였다. 그러나 로마의 지도층과 시민은 사치와 향락에 몰입하고, 스스로 안보위험에 맞서기를 꺼려하기 시작하였다. 안보를 위협하는 야만족을 돈으로 매수하여 회유하거나 용병을 고용하는 정책에 의존하였다. 급기야 반달족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당시 교황인 레오 1세는 반달족에게 살육과 파괴를 극소화하는 조건으로 반달족의 약탈과 로마 입성을 받아들인다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무저항으로 로마에 입성한 반달족은 노략질과 방화로 로마를 철저히 파괴하였고, 수많은 로마시민이 살해되거나 노예로 먼 이국땅에 팔려나갔다. 수많은 시민들이 로마를 버리고 도망갔으며 로마는 인구 수만 명에 불과한 황폐한 도시로 쇠락하고 결국 서로마제국의 붕괴로 이어지게 된다. 이후 로마의 안구는 1000년이 훨씬 지나서야 전성기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오늘날 무분별한 훼손 또는 야만적인 파괴행위를 뜻하는 ‘반달리즘(vandalism)’이라는 용어는 여기서 유래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남의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장대홍 (한림대학교 재무금융학과 교수, dtjaang@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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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정안전부, 2010년 6월 23일자 보도자료.

2) 국방연구원의 여론조사 결과는 우리 국민의 61%가 스스로 안보의식이 낮다고 인정했으며, 자유민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희생할 생각이 없다고 하는 응답이 38%에 이르고, 20대의 27%는 전쟁이 나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한다(조선일보, 양상훈 칼럼, 2010. 6. 27의 국방연구원 여론 조사결과 재인용).

3) McKinsey Quarterly, "South Korea: Finding its place on the world stage," April, 2010.

4) “문명의 중대한 진척은 그것이 어떤 분야이던 중앙집권적 지령에 의해 달성된 적은 결코 없다. 그것은 모두

(특권적 지위에 있지 않는) 개인의 독창성, 확신에 찬 소수의 견해, 그리고 변화와 다양성을 허용하는 사회 분

위기의 산물이다(Milton Friedman, "Capitalism and Freedom," 1962).

5) New York Times, "South Korea’s Collective Shrug By B. R. MYERS," May 27, 2010.

6) John Milton, Samson Agonistes, 1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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