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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책임


모든 경제질서는 부족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보다 인간적인 삶을 영위케 하는 데 그 존재이유가 있다. 그래서 어떤 경제질서도 서민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가진 자와 능력 있는 자만을 위한다고 알려진 시장경제도 결코 서민을 무시하고 홀대하지 않는다. 단지 서민에 다가가는 방법이 감성적인 곳에 호소하면서 복지를 앞세우는 여타 혼합경제질서와 다를 뿐이다. 서민정책과는 달리, 기업이 특히 대기업이 사회적으로 책임이 있는지의 문제는 경제적인 사색을 넘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철학적인 담론을 요구한다. ‘나’는 타인에 대해 또는 타인으로 구성된 이 사회에 어떤 책임이 있는가?


책임은 오직 인간에게만 관련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는 곳에 책임을 논할 자리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책임은 자유의지에서 행한 인간 행위의 귀책 문제로 한정된다. 행위의 원인과 결과에서 성립되는 책임은 가장 보편적이고 고전적이며 우리에게 당연해 보인다. 이러한 책임 개념에서, 자유의지에 의해 성립된 모든 계약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계약 당사자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계약에 있어서 거래의 한 쪽이 다른 쪽에 비해 협상능력이 뛰어 나거나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거나 해당거래에 관한 정보를 더 많이 갖는 경우가 일반적이어서 계약의 결과는 모든 거래 당사자들에게 똑같지 않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하나는 개인의 지식과 힘, 그리고 협상력이 다르다면 자유의지에 의해 계약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공정성과 도덕성이 보장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 간의 능력 차이는 순전히 그 개인에 의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개인 능력의 상당부분은 태생적이고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우연과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의존의 결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문제는 행위 결과와 이에 따른 책임을 그 행위의 주체에게만 귀속시키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못하며, 그렇게 할 수도 없지 않느냐 하는 반론을 제기케 한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공정한 책임의 귀책은 개인에게서 우연의 요소를 제거한 상태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우연의 요소를 현실에서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 우연의 요소는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 일부를 구속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자유질서의 포기를 의미한다. 축구선수 박지성에게 그의 축구 능력에서 우연에 의한 부분을 제거하기 위하여 한쪽 발만으로 축구 경기에 임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현실에서 이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체화된 우연의 요소를 일단 인정하고 그 결과에서 우연의 요소에 해당하는 부분만큼 떼어내는 방법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도덕적 정당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결과에서 우연에 의한 부분을 정확히 가려낼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능력 있는 자가 능력 없는 자보다 우호적인 우연을 더 많이 가졌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자기에게 온 기회를 잡지 못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보아라. 박지성이 그의 동료 슛에 의해 골대를 맞고 나오는 공을 운 좋게 차서 골을 넣었다고 하자. 그 골은 순전히 박지성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골의 과실을 박지성에게 1/4, 그의 동료에게 1/4, 그 공을 방어하지 못한 상대 수비진에게 1/4, 그 나머지를 오늘의 박지성에 이르게 한 모든 이들과 사회의 제도에 돌린다면 그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겠는가? 이것은 우스운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우연의 요소를 제거하고 각자의 몫을 결정하는 ‘리바이어던(leviathan)’이라는 괴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얼마나 무서운 현실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되겠는가?


뿐만 아니라 모든 우연의 요소를 제거하면 무엇이 남는가? 모두 똑같은 인간들만이 남지 않겠는가? 모두 똑같다는 것은 경제학자들에게 익숙한 완전경쟁 세상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는 어떤 경쟁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에크는 이를 ‘모자를 푹 덮어쓰고 잠자는 경쟁(Schlafmützenwettbewerb)’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인간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으며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과제도 던져주지 못한다. 개인의 능력은 끊임없이 주어지는 ‘우연’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의 자세와 노력의 산물로 형성된다. 여기에 경쟁과 자유의 가치가 의미를 갖게 된다.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로 대표되는 고전경제학자들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어떤 경우에도 교환은 교환 당사자 모두에게 이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계약의 ‘우연성’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계약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가 ‘상호 호혜적’으로 귀결되었다면 그 계약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함이 옳다. 즉 계약의 양 당사자는 사회적으로 책임을 다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 계약으로 누구도 해를 입지 않았고 이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하청관계를 유지하려 한다면 그 자체만으로 그 중소기업이 이익을 얻고 있음을 함축한다. 물론 그 계약의 결과는 5대 5는 아닐 것이다. 이익의 배분이 1대 9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단 자율적으로 이루어졌고 상호 호혜적이었다면 계약의 공정성과 도덕성을 인정해야 한다. 국가가 계약에 간여하여 한 쪽으로부터 계약을 포기하는 경우까지 이르게 하기보다는 어떤 경우에도 자유로운 계약을 허용하여 그 계약이 지속적으로 성사되게 하는 것이 그 중소기업을 위하는 길이다. 그래야만 자유질서가 유지되고 그 사회는 발전한다.


책임의 대상과 범위를 자유의지에 의한 자신의 행위 결과를 넘어서 규정하게 되면 책임은 철학적이고 윤리적이며 종교적인 영역으로 들어간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우리에게 구조를 요청한다면 또는 가난한 자가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응대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인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물에 빠지게 하고 가난하게 한 것은 나와는 전혀 무관하지만 모든 생명체는 존재의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의 권한 범위 안에서 이에 응대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라고 논리를 전개할 수 있다. 책임의 본질이 이처럼 ‘나’에서가 아니라 ‘남’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면 그 책임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자신의 권한 안에서 무한책임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죽음까지 내놓아야 하는 그런 책임이다. 그러나 책임을 이렇게 윤리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책임이 자유에 앞서게 되고 개인의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계약사회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모두가 모두에게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면 목적지향적인 인간 행위는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책임은 이처럼 규정하는 자의 논리에 따라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에서 우연에 대한 책임으로, 그리고 사회에 대한 무한책임으로 되어 책임의 대상과 범위는 확대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책임은 자유에 앞설 수 없다. 책임은 사회의 절차적 가치이지만 자유는 사회의 기본가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책임의 외연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공권력으로 개인의 자유의지를 억눌러야 하기 때문에 국가권력의 확대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권력의 남용에 대항하는 유일한 길은 책임을 개인의 행위 결과에 국한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의 가치와 시장경제의 성과를 소중히 여긴다면 책임이라는 명분으로 무분별하게 개인에게 의무를 부과해서는 안 된다.


배진영 (인제대학교 국제경상학부 교수, econbjy@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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