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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산업경쟁력의 명암이 주는 교훈


최근 한국과 일본이 산업경쟁력을 둘러싸고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90년대 후반부터 시작하여 10여년 사이에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1등을 차지한 산업이 여러 개나 되는 반면 일본의 제조업에서는 도요타자동차의 대량 리콜사태에서 보듯이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고 1등을 하거나 일본이 맥없이 한국에 자리를 내주는 상황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최초의 사건은 DRAM부터 시작되었다. DRAM 분야에서 원조인 미국을 제치고 일본이 세계를 주름잡았는데 90년대 후반 들어 한국이 1등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몇 년 뒤 또 하나의 이변이 TFT-LCD 분야에서 발생하였다. DRAM에서 세계 1등을 내어줄 때만 해도 그럴 수 있으려니 했던 일본의 분위기가 돌변하였다. 두 개의 산업에서 연속적으로 한국에 밀렸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조선 산업의 세계시장 점유율 경쟁에서 한국은 다시 일본을 따돌렸다. 조선왕국 일본의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힌 데 이어 적어도 수년간 한국의 조선 산업은 명실 공히 세계 1등의 자리를 고수하였다. 최근 중국의 급부상이 염려스럽지만 한국이 상당기간 동안 조선 산업의 왕좌를 차지했던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로 남게 될 것이다. 최근 1-2년 사이에 소비재 분야인 가전산업 특히 TV산업에서 한국은 일본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세계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한두 분야도 아니고 여러 개의 산업에서 한국의 산업경쟁력은 비약적인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반면에 제조업 최강국인 일본은 과거의 명성이 무색할 만큼 급속하게 경쟁력이 쇠락하고 있다. 무엇이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것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처럼 엄청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학술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요인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많이 거론되는 이야기지만 일본이 ‘볼륨 존(Volume Zone; 중저가 물량위주 시장으로 주로 아시아 중산층 시장을 지칭)’을 외면하고 차별화된 고급시장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일본의 기업들이 경쟁상대를 압도하게 되면서 시장의 규모가 크고 지배력이 높은 분야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이엔드에 집중하였는데 이러한 틈새를 한국이 파고들 수 있었다. 흔히 일본의 제조업은 생산이나 공장이 강하고 관리나 전략은 약하다고 하는데 생산 및 개발 제일주의가 화근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경쟁력 분야의 대가인 미국 하버드대 마이클 포터(Michael Eugene Porter) 교수는 일본이 잘 나가던 무렵 일본 기업에는 전략이 없다는 쓴 소리를 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독자적인 강점이나 포지셔닝을 갖지 못하고 효율에 목숨을 거는 경영방식으로는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포터의 예견이 들어맞았는지 일본은 90년대 이후 골이 깊은 불황과 일시적인 회복을 거듭하면서 전반적인 침체의 국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세계적인 경제위기에서도 일본은 더욱 혹독한 영향을 받고 있다.

한국의 산업과 기업에 있어서 일본의 불황은 매우 유리한 여건으로 작용하였다. 일본이 과거처럼 2, 3년 어렵다가 다시 좋아지면 한국은 그 기회를 활용할 수 없겠지만 이번에는 10년이 넘도록 불황이 지속되면서 한국은 수십 년간 이어져온 추격의 고삐를 더욱 조이면서 마침내 일본을 뛰어넘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한국은 일본의 불황으로부터 반사이익을 누리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품질, 디자인, 기술력 등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룩함으로써 단순한 가격경쟁력이 아니라 종합적인 제품력에 있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최근 몇 년간 지식과 기술의 발전 정도가 두드러진 일부 산업에서 한국 기업들이 획득한 특허의 수나 영향력은 괄목할만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물론 산업 전체로 보면 일본이 아직 커다란 우위를 갖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일본의 대기업들은 우리와 달리 대부분 전문경영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기업들이 소유경영체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그런데 약간 관점을 바꿔보면 산업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 대형투자를 감행하고 고도의 위험부담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전문경영인이 이사회의 동의를 얻어 중요한 의사결정을 신속히 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전문경영체제가 좋은지 소유경영체제가 좋은지는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불황이나 위기국면에서 가족기업이나 소유경영체제의 성과가 높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너십에 기초한 강력한 기업가정신이 나름대로 장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1등이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이유로서 상대방의 선전보다 내부의 자만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일본의 업계는 일본식 경제 및 경영시스템이 갖는 우월성에 대해 높은 자부심을 견지해 왔다. 볼륨 존을 회피하고 고급화를 지향한 것도 그러한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 일본의 시스템을 해외에 이전하여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에 거의 의문을 갖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어느 국제심포지엄에서 한국 기업들에게 일본의 기업 시스템은 경제발전 초기에 비해 준거체계(frame of reference)로서 유용성이 떨어진다는 발표를 하였고 토론자로 참석한 일본의 저명한 교수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일본적인 것의 우수성에 대한 지나친 자만이나 안주가 오늘의 경쟁력 약화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 제조업이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갖게 되면서 일본의 정부나 학자들은 일본적 경영, 모노쯔쿠리1), 지식창조론 등 일본의 강점을 자랑하는 이론체계를 개발하고 지원정책을 시행해 왔다. 지금도 일본 경제산업성은 매년 모노쯔쿠리 백서를 발간하여 홍보와 전파에 힘을 기울이는 동시에 제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에 헌신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제 한국의 일부 산업들이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갖고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기업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우리 것에 대한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다. 한국적 경영 운운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한 것, 남보다 뛰어난 능력이나 업적으로부터 보편적인 원리를 도출하고 더 강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ㆍ기업ㆍ학계 등 모두의 인식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용열 (홍익대학교 국제경영학과 교수, yykim@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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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노쯔쿠리는 일본 제조업 특유의 조직능력을 일컫는 말로, 후지모토 다카히로 도쿄대 대학원 경제학연구과

교수가 제조업에 강한 일본기업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물건을 뜻하는 모노와 만들기를

의미하는 쯔쿠리가 합쳐진 말로 장인정신을 갖고 혼신의 힘으로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낸다는 뜻의 일본어이

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manufacturing으로 번역되었지만 지금은 보통 명사로 표기하고 있다. 이러한 모노쯔

쿠리 정신을 따르고 있는 기업으로는 쿄세라와 미크론, 야노특수자동차, 도요타 등 일본 제조업 명가 등이 이

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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