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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논리, 교육논리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여러 모임이나 각종 집필을 통하여 늘 곤혹을 치르는 일 중 하나가 바로 교육논리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하는 주장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교육논리가 있기 때문에 교육문제를 경제논리로 재단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교육학이 독자적 학문으로 존립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요구되는 전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독자적인 교육논리가 존재하지 않으면 교육학은 여타의 학문(이를테면, 경제학)에 종속되는 하위 학문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마치 교육학자들의 생존투쟁과도 같은 비장한 느낌이 드는 주장이다. 게다가 교육논리는 경제논리 외에도 정치논리에 의하여 재단되어서도 안 된다는 주장으로 확대되기도 한다.1)

과연 경제논리, 정치논리, 과학논리와 배타적 형태로 존재하는 교육논리가 있는가? 이 문제는 다각적으로 그리고 심층적으로 탐구할 가치가 있는 메타 학문적인 주제이다. 여기서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삶의 측면에서 문제의 초점을 맞추고 검토해 보기로 한다. 다음으로 교육논리가 존재한다고 하는 주장의 부당성을 간략히 지적해 보고자 한다. 끝으로 교육현상을 설명하는 데 동원되는 설명기제가 교육학 독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여타의 학문 영역에서 원용하는 개념, 이론적 설명기제 및 방법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기로 한다. 특히 이러한 설명기제를 빌려오지 않을 경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교육현상을 달리 설명할 수 없는 경우를 들어보기로 한다.

그릇된 교육정책에서 언급하는 ‘3불(三不)정책’이 아닌 불교의 ‘3불(三佛)’ 중 법신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오른손으로 왼쪽 검지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법신(法身)이 주는 가르침은 ‘진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진리가 하나임을 드러내기 위하여 비로자나불은 하나인 진리를 증득하신 형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사람들의 삶의 이치를 포함하여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는 원리, 즉 진리가 한 가지로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여섯 바라밀(波羅蜜) 중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의 경우, 막무가내로 무조건 참으라는 가르침인가? 물론 견디기 어려운 치욕스러움도 꿋꿋이 참으라는 가르침에는 틀림없다. 그렇다고 그러는 이유가 극도의 인내심 수양이나 극기 훈련의 일환이라고 답을 한다면 그것은 불교를 모독하는 것이다.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에서도 ‘억울함을 당하여 밝히려 하지 말라’고 이르고 있다. 왜일까? 불교의 교리 속에서 답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인과응보(因果應報) 또는 카르마(Karma)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견디기 어려운 치욕스러움을 꿋꿋이 참아내고 ‘억울함을 당하여 밝히려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전생, 현생의 업보에 따른 것이라는 게 답이다. 여러 현상을 설명하고, 윤리적 행위근거를 드러내는 답은 인과응보와 카르마라는 한 가지 답만이 존재한다.

상황은 기독교 교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삼위일체(聖三位一體, trinity)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신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위(位)가 비록 다를지라도 체(體)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떠나서 기독교 교리를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설명의 틀, 전제, 가정, 기본 개념 등이 한 가지로 일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문한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 보면 불교나 기독교처럼 고등종교의 교리는 일원론에 입각하고 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심신이원론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사정이 이럴진대 교육논리ㆍ정치논리ㆍ경제논리가 각기 존재한다는 주장은 다소 조잡한 느낌이 든다. 교육ㆍ정치ㆍ경제ㆍ문화ㆍ예술 등 모든 인간의 행위나 활동이 ‘잘 살자고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인과응보 또는 카르마,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모두 인간의 삶을 올바르게 규율하고자 하는 종교적 노력이다.

만약 교육논리ㆍ정치논리ㆍ경제논리가 각기 존재한다면 이들 각각은 서로 상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상충된다고 하는 것은 종교의 목적, 교육의 목적, 윤리와 예술의 목적이 각기 다르다는 주장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자면 종교가 지향하는 바, 교육이 지향하는 바, 윤리와 예술이 지향하는 바가 제각기 다른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된다. 그래야 교육논리ㆍ정치논리ㆍ경제논리가 각기 존재하게 된다.

보다 구체적인 논의로 들어가서 교육논리ㆍ정치논리ㆍ경제논리가 각기 존재한다는 주장은 다음을 전제한다.

“정치논리는 민주적 가치와 원리를 실현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위해 변전하는 대중들의 여론에 의존함을 그 특징으로 한다. 경제논리는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율적 선택과 자유로운 경쟁을 선호함을 그 특징으로 한다. 교육논리는 사회적 가치를 존중하되, 궁극적으로 학습자의 성장에 기여함을 그 특징으로 한다.”2)

우선 위의 주장만 가지고 보자. 정치논리의 주요 특징인 민주적 가치는 교육상황에서 배제되는가? 오히려 너무 많이 적용되어 탈이 날 지경이 아닌가? 예컨대 총장 직선제는 교육에서 정치논리가 적용되는 예이다. 그러면 총장 직선제는 교육논리로 설명되는가, 아니면 경제논리(?)로 설명된다고 할 수 있는가? 경제논리의 주요 특징이라고 하는 자율적 선택은 내가 아는 바로는 일반인들이 정치논리로 인식하는 개념이다. 교육논리의 특징인 사회적 가치는 여러 정황에 따라서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이지, 결코 교육 분야에서 독자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학습자의 성장도 마찬가지로 원래는 생물학의 개념이다.

이렇게 보면 교육논리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어느 영역에서도 민주적 가치, 자율적 선택, 효율성을 존중한다. 성장의 개념은 교육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적용된다. 정치제도의 성장과 발달, 정당의 성장, 경제성장 등등.

다음으로 교원평가제,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삼불(三不)정책 등 교육에서 논의되는 현안 문제가 다른 영역의 잣대로 그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특히 교육학자의 경우 자기 학문에 대한 애착도 있고, 다른 학문의 개념이나 방법론으로 설명하면 교육학의 독자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물학자들이 화학이나 물리학적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려 한다고 생물학을 비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응용학문인 의학의 경우에도 기초학문을 원용한다고 의학이 폄하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교육문제를 다른 학문의 개념을 원용하여 설명한다고 그 정체성이 훼손되거나 그 지위가 폄하된다고 할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교원평가제,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삼불(三不)정책 등과 같은 심각한 교육현안을 그야말로 교육내부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해결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필자가 보기에 다른 학문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원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평준화 정책으로 인하여 그 명분과는 반대로 야기되는 사교육 과잉현상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필자가 설명할 수 있는 답 중 하나는 ‘쏠림현상(resonance)’이다. 다양한 교육욕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평준화정책은 그 욕구가 분출되는 것은 대학입시라는 단일한 출구밖에 없다. 대학입시 성공이라는 획일화된 교육욕구를 효과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수단은 평준화 정책 아래서 사교육밖에 없고, 따라서 사교육에 집중하는 쏠림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쏠림현상은 물리학에서 나온 개념이다. 그러나 이는 심리학, 경제학 등 다양한 학문에서 원용하는 개념이다. 쏠림현상은 물리학이 독점하는 개념이나 논리체계가 아니다. 인간의 특정현상을 설명해 주는 보편적인 개념이다. 여기서는 평준화 정책의 한 가지 폐해를 설명해 주고 있다.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는 어느 학문의 논리인가? 이 개념은 평준화 정책의 설문에서 이중 응답 양상을 깔끔하게 설명해 준다.3) 죄수의 딜레마는 심리학의 논리인가, 경제학의 논리인가, 아니면 정치학의 논리인가? 인간의 특정 행동을 설명해주는 기제이다.

역시 평준화 정책의 폐해를 ‘보완’(?)하려고 고안된 내신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필자가 보기에 이는 경제학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적정 이윤’의 개념을 원용하면, 내신제의 심각한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경제학에서 ‘적정이윤’은 시장의 자생적 기능을 믿지 않고 외부의 개입에 의하여 이윤의 ‘거품’을 빼라고 할 때 사용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평준화 정책’으로 모든 학교의 상황을 동일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각 학교의 동일 석차를 동일하게 취급하라는 내신제 지침을 설명할 때 준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사실 평준화 정책 대상의 학교 학생들의 학력 분포는 좌파 지지자들의 주장이 무색할 정도로 그 편차가 매우 심하다.4) 내신제를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유명 사립대학들이 고교등급제, 즉 고등학교 석차에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를 입증한다.

초과수요는 경제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개념이지만, 이 개념이 경제논리라는 독자적인 논리체계를 구축해 주는 것이 아니다. 교육에서도 사용된다. 최고가격제는 교육에서 등록금 인상억제책으로 나타난다. 최고가격제는 초과수요를 가져온다. 특히 중등교육에서 등록금 규제로 인하여 초래되는 초과수요가 사교육 의존 현상이다. 이렇게 설명한다고 해서, 교육학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교육학의 한 분과인 교육재정학 또는 교육경제학에서 총교육비 산출에 ‘기회비용’이라는 경제학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육경제학자와 교육재정학자들은 교육논리가 따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삶을 보다 나아지게 하는 여러 활동이 있고 이를 설명하는 다양한 개념과 이론 틀 그리고 설명 기제가 있지만, 그것이 한 분야의 독자적인 논리체계가 있다는 근거를 마련해 주지 못한다. ‘경제’라는 말 자체가 온전하게 살게 한다는 의미이고, ‘정치’라는 말도 바르게 살도록 한다는 의미이고, ‘교육’도 잘 살기 위해 뭔가를 배워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상호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논리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들었던 민주적 가치, 자율과 선택, 쏠림현상, 죄수의 딜레마, 적정이윤, 최고가격, 성장 등의 주요 개념이 비록 한 학문에서 발생하여 정착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학문이 전유하는 논리체계를 구축한다고 할 수는 없다.

끝으로 하이에크가 설파한 주요 개념들, ‘자생적 질서’, ‘발견적 절차’ 등은 어느 논리를 구축하는 개념인가? 경제논리를 구축하는가? 정치논리를 구축하는가? 아니면 교육논리를 구축하는가? 아니면 철학논리(?)를 구축하는가? 필자가 파악한 바로는 하이에크의 주요 개념을 통하여 얻어낼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진리는 좌파들처럼(?) 자만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이는 성경(聖經)에서도, 불경(佛經)에서도, 주역(周易)에서도, 논어(論語)에서도 강조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교육논리도 아니고, 정치논리도 아니고, 경제논리도 아니고, 그리고 그 밖의 어떤 별도의 논리도 아니다. 교육논리, 정치논리, 경제논리,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논리는 상호 배타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김정래 (부산교육대학교 교수/교육학, duke77@bnu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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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러한 주장은 여러 형태로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가장 최근에 교육논리를 경제논리는 물론 정치논리로 재

단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학술지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김기민, 2009, “정치논리, 경제논리와 비교해본 교

육논리의 특징”, 교육과정평가연구 제12권 제1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1-22쪽.

2) 김기민, 위의 논문, 국문요약.

3) 쏠림현상, 죄수의 딜레마, 지대추구 등의 개면으로 평준화 정책의 폐해를 설명할 수 있다. 이에 관하여는 필

자의 근간 보고서에서 상세히 밝혀질 것이다.

4) 이를테면 같은 서울 지역에서도 제8학군(강남구, 서초구)의 서울대학교 합격자 수는 제1학군(동대문구, 중랑

구)의 서울대학교 합격자 수의 10배가 넘는다. 평준화 정책지지 좌파들의 논거에 따르면, 오차 범위 내에서

비슷한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 따라서 평준화지지 논거인 균형 이론은 그른 것이라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균형이론’이 그르다는 것은 경제논리와 교육논리가 구분되어 따로 존재하지 않는 또 하나의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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