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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 거품, 시장의 광기였나 정책의 실패였나?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생상품 시장에서 시작되었던 금융위기의 원인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들이 분분하다. 이견의 핵심은 그것이 시장의 실패이냐, 아니면 통화정책의 실패이냐이다. 이를 두고 금융위기가 현재 진행형이라 충분한 분석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난 1929년의 대공황과 같은 과거의 위기를 두고도 똑같이 의견이 갈린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충분한 시간은 원인을 분석하고 진실을 밝히는데 사용될 수도 있지만 진실을 망각 속에 묻고 사실을 왜곡하는 말미가 될 수도 있다.


미시시피의 거품에 대한 여러 견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최초의 금융위기이자 국제적 위기로 알려진 프랑스의 ‘미시시피 거품’(1720)이 그 동안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보자. 미시시피 거품의 중심에는 스코틀랜드의 사업가이자 경제이론가인 존로와 유럽을 제외한 전 세계와의 무역거래 독점권을 가진 인도회사(Compagnie des Indes)가 있었다. 1720년 금융위기는 이 인도회사의 주식가격이 1년 사이에 500리브르(livre tournois)에서 1만 리브르로 올랐다가 1년 후 다시 500리브르로 급락하는 이변과 관련하여 전개된 프랑스 경제의 전반적인 위기를 지칭하는 것이다. 주식가격 1만 리브르로 평가한 이 회사의 시가총액은 54억 리브르로 GDP의 1.8배1)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이다. 게다가 국왕 루이 15세가 이 회사 지분 18.5%를 보유한 대주주였다는 사실은 이 주식가격 거품의 문제가 한 외국인 모험가나 일개 무역회사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경제사상사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세속의 철학자들(Worldly Philosophers, 1953년)』에서 로버트 하일브로너(Robert Heilbroner, 1919~2005년)는 미시시피 거품을 한 모험가(존로, John Law)의 터무니없는 사기행각에 놀아난 시장의 광기 정도로 치부했다. 반면 금융위기의 역사서 가운데 고전으로 꼽히는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Manias, Panics, and Crashes: a History of Financial Crisis)』에서 찰스 킨들버거(Charles Kindlberger, 1910~2003년)는 미시시피 거품은 사기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존로의 시스템이 잘못된 가정에 기초했기 때문에 발생한 실수이지 사기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존로 개인의 실수와 시장의 투기 광기 이상의 미시시피 거품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 몸소 이 금융위기를 경험한 당대의 위대한 사상가 볼테르(Francois-Marie Arouet, 1694~1778년)의 견해는 다르다. 그는 “무역과 사치품에 대하여”(1738)라는 에세이에서 프랑스인들이 알고 있는 금융과 무역에 대한 모든 지식이 존로의 덕이며, 자본금 5천만 리브르의 인도회사와 300척에서 1,800척으로 늘어난 상선이 모두 존로 시스템의 폐허로부터 이루어낸 결과라면서 존로 시스템 실패의 원인을 변화를 거부한 프랑스 사회에 돌리고 있다. 존로가 인도회사를 설립할 당시 소르본느 지식인들이 주식의 이익배당을 고리대금으로 규정한 것에서 드러나는 강한 사회적 편견을 예로 들고 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사실은 볼테르가 1720년의 금융위기를 존로 시스템이라는 국가차원의 거시경제정책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어떻게 외국인 사업가가 프랑스 경제를 좌우하는 위치에 이를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미시시피 거품의 핵심에 접근하는 방법일 것이다. 존로는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라 슘페터가 높이 평가한2) 경제이론가로서 인도회사의 설립과 1720년 거품 에피소드는 그의 금융이론3)에 기반을 둔 정부부채청산 및 경제 활성화 프로그램의 수행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다는 사실이다. 경제가 불황이어서 놀고 있는 자원이 있다면 신용통화의 발행은 실물경제를 확장시키고, 실물경제의 활성화는 화폐수요를 증가시키기 때문에 통화팽창이 물가압력으로 작용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근거한 프로젝트의 재원조달은 지불수단으로 사용될 신용화폐를 발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일단 재원이 조달되면 낭비하던 자원을 활용하여 이익을 얻을 것이고 아울러 일반대중의 통화에 대한 신뢰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장기간에 걸친 고비용 전쟁으로 파산상태의 정부재정을 유산으로 남겼고, 정부는 국가채무에 대한 이자도 제 때에 갚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거래를 매개할 금화와 은화의 부족에 기인한 신용위축으로 경제는 불황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1715년 프랑스 경제는 존로의 이론을 테스트해 볼만한 최적의 상황이었고, 존로는 새로 등극한 루이 15세의 섭정인 오를레앙 공을 설득하여 그 기회를 얻었다.

루이 15세 치하의 프랑스라는 실험실을 얻은 존로의 ‘신금융 시스템’ 아이디어는 곧이어 실행계획으로 구체화되었다. 실행계획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새 통화제도를 구축하는 것으로. 법정통화를 발행할 르와얄은행(Banque Royale)을 출범시키고 존로의 통제하에 두었다. 두 번째는 인도회사의 사업으로 새 은행의 자금지원으로 해외식민지를 개발하고 식민지와의 무역을 독점하는 인도회사가 번영하고 부를 창출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번영하는 이 회사의 주식을 발행하여 주식매각대금으로는 시민들의 수중에 있는 국채를 매입하는 것이었다.

통화제도의 중심이 될 은행과 사업을 총괄할 인도회사를 설립한 후, 프로젝트 실행계획의 마지막 단계인 국채 회수는 주당 5천 리브르에 10만 주(총 5억 리브르)씩 3차에 걸친 신주발행을 통해 이루어졌다. 주식대금은 동일 액면가의 국채나 르와얄 은행권으로 10개월에 걸쳐 분할 납부토록 했고, 이때 르와얄 은행은 투자자들에게 인도회사의 주식매입대금을 대출해 주는 편의까지 베풀었다. 이제 과제는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인도회사가 식민지의 개발과 무역으로 투자자들이 기대하는 이익을 배당해 주고 프랑스 경제를 활성화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존로의 정책이 제공한 새로운 투자기회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투자자들의 자금을 프랑스로 끌어들였고, 인도회사가 식민지에서 유럽이 원하는 상품의 생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 주식가격은 1만 리브르까지 올랐다. 이제 투자자들은 주식가격 상승으로 얻은 자본소득을 실물이나 금으로 바꿔 이익을 실현하려 하나 이 수요를 충족시켜 줄 실물의 공급은 크게 부족했다. 정부는 인도회사의 신주발행을 허용할 때마다 르와얄 은행의 통화발행 한도도 확대해 주었기 때문에 통화량은 급격히 늘어났다. 신용확대 정책은 물가상승으로 나타났고 인도회사 주식 투자자들의 이익실현 욕구를 더욱 자극하는 악순환이 시작되면서 주식가격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국왕 소유의 주식 10만 주도 주당 9천 리브르에 회사가 인수하고 대금 3억 리브르는 르와얄 계좌에 나머지 6억 리브르는 10년 동안 상환키로 하여 가장 강력한 내부자는 일찍이 이익실현을 끝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국채의 부담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반면 국채를 보유하고 있던 투자자들은 10분의 1 가치의 인도회사 주식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제 미시시피 거품이 시장의 실패였는지 정부의 실패였는지의 판단은 독자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놓겠다.

김우택 (한림대학교 명예교수, wtkim@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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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ivre의 1726년 금 태환비율 0.336g과 현재의 금 시세(온스당 900달러)로 환산한 54억 리브르의 규모는

Maddison(2003)의 1700년 프랑스 GDP 추정치를 2008년 달러로 환산한 액수의 1.81배에 상당함.

2) Schumpeter 1954, p.295.

3) 그의 이론은 Law(1720; 2003, pp.180-192)에 잘 요약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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