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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경제학과 음울한 과학


지난해 9월 리먼 브라더스 파산 사태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각국 정부가 경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경제 긴급조치를 실시한 지 1년이 되어간다. 지금은 긴급조치 해제를 뜻하는 “출구전략(exit strategy)”이 거론되고 있다. 경제가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다. 참으로 다행스럽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글로벌 위기에 대한 경제학의 책임과 관련된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 과정을 추적하면 흥미롭게도 경제학이 통째로 “음울한 과학(dismal science)”이라고 비판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대 경제학이 금융위기의 주범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위기의 설명이나 예측에 속수무책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런 말로 경제학에 대한 불신과 냉소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주류경제학으로서 경제학계를 지배하는 신고전파 경제학, 오스트리아학파와 독일의 질서경제학파 등 다양한 패러다임들이 존재함에도 이들 가운데서 책임질 특정의 경제학을 가려내지 않은 채, 경제학 전체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는 것은 대단히 성급하고 위험한 일이다.


2000년대 초 돈을 풀어 경기부양 붐이 조성될 때 이를 환호하면서 호경기가 끝없이 지속될 것이라고, 비록 경기 침체가 생긴다고 해도 경제학 지식의 발전으로 경제위기와 같은 큰 문제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경제학자들이 있었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었다. 그들의 순박한 목소리는 대부분 국가의 경제상황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경제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좌파들이 “신자유주의의 악마”라고 거칠게 비판하는 미제스-하이에크 전통의 “오스트리아학파”이다. 이 학파는 확고한 철학적ㆍ방법론적 그리고 법학적 토대는 물론 풍부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심오한 세계관을 확립했다. 그리고 이 세계관에 비추어 값싼 돈과 과잉투자, 그리고 이로부터 초래될 경제 침체의 위험성을 집요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경고의 목소리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1929년의 대공황으로부터 얻은 역사적 경험과 이론적 인식을 토대로 하여 독일적 자유주의를 확립한 오이켄(Walter Eucken)-뢰프케(Wilhelm Röpke) 전통의 질서경제학파이다. 준칙주의의 통화정책, 사유재산의 원칙, 계약의 원칙 그리고 개방원칙과 책임원칙 등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을 위반할 경우에는 경제위기가 발생한다고 경고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적중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중심에는 미국 연방준비은행(FRB)의 확장정책이 있었다. 상환할 수 있는 소득을 벌 전망이 거의 없는 사람이 담보대출을 통해 구입한 주택과 같은 재산은 지속가능한 처분권과 결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유재산이라고 볼 수 없다. 시장은 이런 재산을 기초로 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지역재투자법이나 그 밖의 주택정책에 따라 대출심사 완화를 강요하여 은행으로 하여금 저소득층에 대해 반강제적으로 대출을 하게 한 것은 계약자유의 위반이다. 모든 유한책임은 책임원칙의 위반이고 그래서 반 시장적이다. 내재적인 위험을 스스로 부담하는 대신에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구성된 금융제도도 책임원칙의 위반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음울한 과학”의 주인공은 오스트리아학파와 질서경제학파가 아니라 “신고전파 경제학”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1870년대 “신고전파 혁명”이라고 부르는 과학 혁명의 소산이다. 애처롭게도 뉴턴의 자연관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이것이 주류경제학이 되었는데 이번 금융위기로 그 혁명은 실패했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 번째로 신고전파는 경제학이 시장과 사회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경제와 사회를 인위적으로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경제위기로 이끈 정부의 경제 개입의 길을 열어준 그런 믿음은 전적으로 데카르트 (R. Descartes)전통의 지식의 자만이다. 학자가 각처에 분산되어 있거나 새로이 생겨나는 지식을 전부 수집ㆍ이용하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에크와 뢰프케는 현명하게도 그런 지식이 없이도 가능한 "원리의 설명" 또는 "패턴 예측"에 국한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이 경제정책에서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법적ㆍ제도적 원칙을 중시하는 것도 경제학의 설명-예측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수리적ㆍ계량적 형식화 때문이다. 이런 형식화가 없는 것은 경제학이 아닌 것으로 취급한다. 경제학이 현실과 전혀 관련이 없는 제2의 물리학이 되었다. 금융공학ㆍ경제공학이 그런 연유에서 생겨난 말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학파나 질서경제학파는 수리화와 계량화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제학을 반대하면서 신고전파가 무시하는 역사ㆍ철학ㆍ법ㆍ심리학 등을 경제 분석에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신고전파의 시장균형에 대한 믿음이다. 경제를 배분 기계처럼 다룬다. 기계론적 사상의 전형이다. 신고전파에서 자유를 불필요한 가치로 취급하고 몰가치적인, 기껏해야 개별경제주체의 차원에서나 의미가 있는 효율을 강조하는 것은 그런 시각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학파는 시장을 기계가 아니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들이 사는 세계로 본다. 시장을 발견의 절차로 이해하는 것, 지속적으로 오류를 수정하는 과정으로 보는 것, 균형이 아니라 진화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도 그런 시각 때문이다. 그래서 효율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결론적으로 경제위기는 뉴턴의 세계관에 의존하는, 그리고 데카르트의 지적 자만을 전제하는 신고전파 경제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때이다. 그리고 신고전파의 음울한 경제학 대신에 오스트리아학파와 질서경제학파가 전면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이들이 지속가능한 자유와 번영의 길을 약속할 수 있다.


민경국 (강원대학교 경제무역학부 교수, kkmin@kangw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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