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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 강화ㆍ서민 정책과 시민들의 충성심


춘천을 오락가락한 지도 27년이 지났다. 처음 4년 동안은 대학의 시간 강사로 일주일에 이틀 동안 출강했다. 취직한 뒤에는 일주일에 4-5일은 머물고 주말에 서울로 온다. 이제 몸이 게을러져 한 주 건너뛰는 경우도 많아졌다.

춘천은 행정도시ㆍ교육도시라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다. 춘천ㆍ서울 간 고속도로와 철도 복선화가 완성되면 유동 인구는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집에서 밥을 해먹을 처지가 못 된다. 이런 상황에 발맞추어 식당은 점점 더 늘어난다. 자기 사업을 하고자 할 때 가장 시작하기 쉬운 것이 식당이라고 한다. 전국에서 인구 당 식당이 가장 많은 곳이 춘천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식당의 생명은 짧아서 신장개업과 폐업이 반복되다 보니 덕을 보는 곳은 인테리어 사업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객지에 오래 살면서 매식을 하다보면 단골집도 생기기 마련이다. 어떤 집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몇 년 사이에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끝은 창대한” 식당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어떤 집은 학생이 몰리지 않는 인문학 강의처럼 한산하더니 얼마 뒤에 가보면 다른 업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내가 밥벌어 먹고 사는 인문학의 운명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러나 흥하는 식당이나 문을 닫는 식당이나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라진 단골 식당을 보면 그 식당에 대한 소비자의 충성심이 부족했던 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단골집은 단순히 안면으로만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곳으로 맛있는 음식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단골집에 대한 충성심이 약하다고 질책할 수만은 없다. 손님이 충성심을 계속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식당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노력 가운데 음식의 맛과 질이 향상되고 서비스가 향상된다. 작은 식당이든 큰 기업이든 이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도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면서 소비수준이 높아지고 시장 환경도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고급 소비자를 겨냥한 백화점이 늘어나고, 거대한 주차 시설을 갖춘 대형 마트가 생겨난다. 춘천만 해도 대형 마트가 여럿 들어왔다. 서울과 거리가 짧아지면서 대형 마트의 입점도 늘어날 전망이다. 이렇게 되자 재래시장은 존폐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대형 마트에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와 물건이 만날 뿐이다. 소비자는 구멍가게나 재래시장에서와는 달리 단순히 물건만을 구매할 뿐이다. 물론 물건을 구매하는 그 이면에는 익명의 사람들을 협동과 신뢰로 안내하는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조금이라도 좋은 물건이나 싼 물건이 나오면 망설임 없이 그 물건으로 옮겨 간다. 이제 거래에서의 전통적인 충성심은 사라지고, 상품을 만든 회사에 대한 신뢰와 상품에 대한 충성심만 남게 되었다. 세상이 변하면 변한 세상에 사람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이런 세태를 탓할 수는 없다. 법으로 이런 사태를 막을 수는 없다. 법으로 소비자의 이런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공할 수도 없다.

이명박 정부가 ‘중도 강화’로 선회하고, 거리에서 서민의 정치를 표방하면서 재래시장과 골목가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6월 30일 이 대통령이 서울의 골목시장을 방문했을 때 야채가게 주인은 큰길에 대형 마트가 들어선 후 골목시장으로 장을 보러 오는 주부가 크게 줄었다고 하소연했다. 대형 마트가 들어오면서 문 닫은 야채가게와 과일가게, 빵집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골목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대형 마트 때문에 어렵다고 호소하자 대통령은 “정부가 대안을 여러 각도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이 나오자 곧 정부ㆍ여당은 대형 유통업체의 SSM(대기업 슈퍼마켓, Super Supermarket, 대형 유통업체가 1000-3300㎡ (약 300-1000평) 규모로 운영하는 소매점) 진출 규제를 위한 법안 마련에 나섰다.

지식경제부 통계에 따르면 2000년에 196개였던 SSM이 2008년에는 477개로 증가하였다. 중소기업중앙회의 통계에 따르면 대기업 슈퍼마켓 주변 중소유통업체들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1년 미만인 경우가 60%가 넘는다. 대형 마트의 입점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매출 감소액도 30%에 이른다.

최근 몇 년간 유통업계에서 대형 마트 출점 규제는 첨예한 논란 거리였다. 17대 국회에서는 관련 규제 법안이 여러 번 제출되었지만 논란 끝에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다. 그러나 최근 관련 부처와 한나라당이 당정협의회에서 3000㎡ 이상 대형 규모 점포에만 적용되는 개설 등록제를 ‘대규모 점포 및 대규모 점포의 직영점’으로 확대하는 내용의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을 마련하면서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이에 대한 대기업 유통업체들의 반발은 당연하다. SSM 출점 규제안과 관련해 시장원리에 어긋나는 규제이기 때문에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반응도 나온다. 이에 대한 전국소상공인단체협의회의 대응도 만만치 않다. 첨예한 이익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2009년 7월 1일)는 양측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선진국에 비해 뒤지고 있는 유통산업이 발전하기 위해 유통산업의 현대화와 대형화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내수 진작을 위해 유통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고 기존의 지역 소상공인의 어려움을 그대로 둘 수만은 없다는 주장을 무시할 수도 없다. 유통산업 육성과 자영업자 보호 사이에서 어떤 법이 만들어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정부가 약자에 대한 동정심에 호소하는 법을 만든다고 해서 골목상권이 살아날 수는 없다. 정부는 약자를 보호하려는 선한 의도에서 법을 만든다 할지라도 결과는 그 반대일 수 있다. 소비자들의 행동 패턴은 정부가 바꿀 수 없고, 그 패턴을 거역하는 규제는 성공할 수 없다. 정부는 소비자의 욕구에 기초한 상권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가로막고 규제를 통해 개입하면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상황 변화에 대한 소상인들의 대처 능력을 약화시킬 뿐이다. 정부가 아무리 골목가게를 보호하는 법을 만든다 할지라도 가게 주인의 손님에 대한 성실성과 애정, 이에 부응하는 손님들의 선호가 살아나지 않으면 이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좋은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신중섭 (강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joongsop@kangw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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